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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노리큐

센노리큐(1522∼1591)

센노리큐센노리큐초상화 (사카이시 박물관 소장)

센노리큐와 함께「와비차」의 세계로
나라전체가 전란에 휩싸였던 중세의 16세기, 해외무역 등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호상(대상인)들에 의해 사카이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다도를 비롯한 일본의 선진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지금도 이어지는 와비차라는 다도법을 완성시킨 인물로 유명한 것이 바로 센노리큐입니다.

당시의 사카이 상인들은 그 막대한 재력을 배경으로, 권력자들도 무시못할 정도의 세력으로 성장, 자치도시를 이루었습니다. 센노리큐도 그런 사카이 호상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센노리큐가 완성시킨「와비차(도구나 예법보다는 화경청적의 경지를 중시하는 다도법)」는 두평 남짓한 작은 다실 안에서 행해지는 극히 간소한 것이었습니다.
「사카이의 다테다오레」(훌륭한 집을 짓기 위해 가산을 탕진한다는 뜻)라고 불릴만큼, 실내를 금으로 치장, 서양식 병풍에 둘러싸여 생활하던 사카이 상인이 간소하기 그지없는 다실에서 차를 즐기는 것, 모든 사치스러움에서 이탈, 극도의 억제속에서 배어나는 긴장감을 즐기는 것은 최고의 사치이자 새로운 문화였습니다.

이러한 풍류를 전해주는 한 일화가 전하는데, 천하를 제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접대를 맡게 된 센노리큐는 당시에 매우 귀한 꽃이었던 나팔꽃을 모두 잘라내고 단 한송이만을 장식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센노리큐는 사카이의 부유한 어물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찌기 다도에 입문, 기타무키 도친과 다케노 조오에게 다도를 사사받고, 난슈지 절의 다이린 소토로부터 소에키라는 법호를 받았습니다.
다도를 통해 노부나가와 교류, 그의 사후에는 히데요시의 차두(차를 담당하는 직함) 로서 활약, 다도를 대성시켰습니다. 기타노의 대다도회를 감독하는 등 천하제일의 다도가로 권세를 누리지만, 오다와라의 사후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자결했습니다. 현재의 다도 센케의 시조이며,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센노리큐 저택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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